이미 가언명령이 목적을 중시하신다고 이해하셔놓고 가언명령이 동기론에 속하느냐고 물으시면..ㅋㅋ아 그러면 동기랑 목적이랑 헛갈리시나보네요. 칸트가 동기를 중요시하는 것은 그 동기가 선의지,실천이성에 기인할 때 뿐입니다. 선의지는 무조건적이고 동정심같은 감정이 들어갈 순 없죠. 그러나 목적은 다릅니다. 목적은 무조건적인 선의지 이외에, 윤리적 행동에 앞서 어떤 목적의식이 드러나는 것이죠. 그런 목적이 드러나는 문장이 바로 가언명령이기 때문에 가언명령=목적론적 윤리설=결과주의 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가언명령은 내가 지금 양로원에 기부를 하면 나중에 기부 환급금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거야. 라는 문장입니다. 기부를 하는 것은 윤리적 행위이지만 기부 환급금이라는 이득적 목적이 드러나므로 가언명령이 되는 것이죠. 정언명령은 가언명령과는 반대로 '-한다면'같은 가정적 조건이 진술되지 않습니다.
가언명령은 목적중시죠 ㅎㅎ 예컨대 칭찬을 '받기위해' 선행을 했다 이런상황은 칭찬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행했기때문에 칸트의 입장에서는 비판 받을만한 행동입니다.
이미 가언명령이 목적을 중시하신다고 이해하셔놓고 가언명령이 동기론에 속하느냐고 물으시면..ㅋㅋ아 그러면 동기랑 목적이랑 헛갈리시나보네요. 칸트가 동기를 중요시하는 것은 그 동기가 선의지,실천이성에 기인할 때 뿐입니다. 선의지는 무조건적이고 동정심같은 감정이 들어갈 순 없죠. 그러나 목적은 다릅니다. 목적은 무조건적인 선의지 이외에, 윤리적 행동에 앞서 어떤 목적의식이 드러나는 것이죠. 그런 목적이 드러나는 문장이 바로 가언명령이기 때문에 가언명령=목적론적 윤리설=결과주의 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가언명령은 내가 지금 양로원에 기부를 하면 나중에 기부 환급금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거야. 라는 문장입니다. 기부를 하는 것은 윤리적 행위이지만 기부 환급금이라는 이득적 목적이 드러나므로 가언명령이 되는 것이죠. 정언명령은 가언명령과는 반대로 '-한다면'같은 가정적 조건이 진술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