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분야의 세계적 석학-정근모 박사-우리에게 과학기술이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처 장관 두 차례 역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산파, 한국표준형 원자력발전소 탄생의 주역. 삶 자체가 한국 현대 과학계의 역사인 정근모 박사는 국내 과학계에 크고 작은 업적을 남겼다. 지금도 초일류 대한민국 건설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쉼 없이 고민하며 뛰고 있는 정근모 박사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저는 5남매의 셋째로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누님과 형님이 계시고 아래로 여동생이 둘인데, 아버님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어요. 두 분의 영향으로 누님은 피아니스트, 형님은 덕성여대 사무처장, 제 밑의 여동생은 미국에서 교수 겸 의사로 활동했고요, 막내 동생은 컴퓨터 전문가가 됐으니 교육계 집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가 어렸을 때는 어머님께서 학교에 가시니까 방학 때마다 동요 한 편, 글짓기 한 편씩을 매일 숙제로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책도 매일 읽어야 했어요. 그것이 저에게는 큰 바탕이 되었습니다. 폭넓은 독서와 문학 활동으로 생각의 폭이 넓어지면서 입학시험이나 학력경진대회에서 여러 차례 1등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이었지만 제가 책 읽는 모습을 좋아하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공부했고, 시험을 봐서 경기중학교에 입학했죠.
1등 인생을 걸어온 정근모 박사는 경기고등학교를 4개월 만에 끝냈다. 정 박사의 성적에 놀란 담임 선생님이 정 박사의 부친과 상의한 끝에 대입에 도전하기로 했고, 경기고등학교 1학년 1학기 때 대학 검정고시에 응시해서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해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지원해 차석으로 합격한 정 박사는 ‘서울대학교 3대 천재’로 불렸다. 사진은 대학검정시험 합격 당시의 모습.
천재라는 말은 과분하지만 시험은 잘 본 편이예요. 경기중학교와 고등학교를 1등으로 입학하고 시험 볼 때마다 성적이 좋으니까 선생님들이 고등학교 1학년 때 ‘대학입학 검정시험을 보라’고 권유를 하셨어요. 그래서 시험을 봤는데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차석으로 입학했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19살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제가 소년가장이 되었거든요. 동생들도 한창 공부할 나이였기 때문에 저는 과외교사를 하면서 동생들 학비 모으고, 학업을 병행해야 했습니다. 꽤나 힘겨웠던 4년을 보내고 1959년에 대학교를 졸업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행정대학원이 생겼어요. 당시만 해도 외국 교수진이 우리나라에 와서 가르친다는 것이 드문 일이었는데, 행정대학원은 미국 교수들이 직접 와서 가르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응시를 했죠. 그때 선택과목으로 수학을 택해서 만점을 받고 수석으로 합격을 했어요.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요, 한국일보사에서 저를 인터뷰하러 왔어요. 물리학도가 행정대학원에 입학했으니 화제가 됐던 거죠. 기자가 “왜 행정대학원에 가느냐?”고 묻기에 “우리나라가 기술자를 천대하니까 항의하기 위해서 갑니다.”라고 호기롭게 말했죠. 당시는 젊었으니까요. 그러자 ‘과학신동, 기술자에 대한 천시 항의, 행정대학원에 수석 입학’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크게 났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그 신문을 보시고 “왜 공부 잘하는 학생을 행정대학원에 보내느냐? 그러지 말고 미국에 보내서 물리학을 공부하게 하라.”고 하셔서 행정대학원은 1학년만 다니고 1960년 3월 24일에 미국으로 가게 됐습니다.
그렇게 다시 물리학을 공부하게 됐는데 사실 저는 행정학이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빨리 졸업하고 다시 행정학 박사를 하겠다는 생각에 2년 반 만에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플로리다 대학의 조교수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스물 세 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스물 넷에 대학교수가 된 거죠. 그때는 학생들보다도 나이가 어려서 ‘꼬마 교수(Boy Professor)’로 불렸습니다.
우리나라는 1991년이 되어서야 UN에 가입했지만, UN 산하 기구인 국제원자력기구(IAEA)에는 1957년 가입한 초창기 멤버입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 경제 사정이 최악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을 통한 국가 발전을 역설하면서 1959년, 정부에 ‘원자력원’을 설치하고 원자력원장으로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김법린 박사님을 임명했습니다.
미국에 가기 전, 거기서 인턴으로 김법린 원장님을 보좌했는데, 제가 ‘미국에 공부하러 간다’고 하니까 그 분께서 할 말이 있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쭈었더니 “자네 미국가면 박사 학위 받을 건가?”하고 저에게 되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네, 가면 공부해야죠.” 했더니 “박사 하지 말게.”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왜 안됩니까?” 했더니 “한 사람이 노벨상을 받는다고 그 나라 과학기술이 정말 변하겠나? 아니야. 과학기술이 발전하려면 공부할 수 있는 환경부터 조성해야지. 허니 자네는 미국에 가면 자네 일신의 영광을 위해서 공부하지 말고, 미국이 어떻게 과학기술 영재를 기르고, 국가가 만든 연구소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또 산업계는 어떤 연구를 해서 미국이 세계 1등 국가가 될 수 있었는지를 잘 보게.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거야. 자네가 과학기술 영재를 기르는 학교, 연구소를 만드는 일을 해서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의 토대가 되어 주게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실 그런데 당시 저는 제 공부가 우선이었어요. 그래서 원장님의 당부를 흘려 들었었죠. 그런데 박사 학위를 받고 나니까 그때 저를 붙잡고 간곡하게 하신 말씀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대학 교수로 있는 것보다는 ‘미국을 선도하고 있는 대학교나 연구소에 가서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프린스턴 대학교로 갔지요.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에는 우주 물질의 99%를 구성하고 있는 핵융합 에너지를 실용화하는 핵융합연구소가 있었는데, 그 연구소가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연구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연구소에 들어가겠다고 신청을 했고, 1964년부터 1966년까지 그곳에서 연구를 했죠.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로 핵융합 연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정근모 박사는 KAIST(한국과학기술원) 설립의 산파로 불린다. 그가 1969년 제출한 보고서 <한국의 새로운 응용과학기술대학원 설립안>을 바탕으로 KAIST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KAIST 설립을 주도한 김기형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과 함께 찍었다.
프린스턴대학교 핵융합연구소에서 연구를 하다가 1966년 MIT의 연구교수가 됐어요. MIT 연구실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하버드대학교가 있는데, 제가 연구교수로 MIT에 갔을 때 마침 하버드대학교에 과학기술 정책대학원이 처음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저도 참여를 해서 <후진국에서의 두뇌 유출을 막는 정책 수단>이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설립의 발단이 됐습니다.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이 추구한 국정 목표 중 하나가 지금의 KAIST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제 논문을 본 과학기술처 초대 장관인 김기영 박사님이 ‘빨리 귀국해서 브리핑을 하라’고 연락을 주셨어요. 그래서 1970년 3월 24일, 미국에서 10년 만에 귀국해 과기처 직원들과 함께 브리핑 자료를 준비해서 1970년 4월 8일, 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우리나라에도 이공계 특수 대학원 설립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보고를 했죠.
김학렬 경제부총리 및 주요 정부 각료와 공화당 지도부, 청와대 보좌진이 참석하는 경제동향보고회의는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당정협의회의 성격을 지녔는데, 회의가 끝나고 옆방으로 옮긴 주요 참석자들이 대통령과 함께 국수로 점심을 들면서 보고된 KAIST 설립안을 토의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문교부에서 강하게 반대를 했어요. ‘그 많은 예산을 들여서 새로운 이공계 특수 대학원을 설립하느니 기존 국립 대학교에 지원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거죠.
그때 저는 박정희 대통령 옆에 앉아 있었는데, 한참을 생각하던 대통령이 남덕우 재무장관을 향해 “이 중에 대학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남 박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남덕우 장관은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시절, 박정희 대통령에게 발탁돼서 재무부 장관이 되신 분이셨어요. 이 분이 또렷한 목소리로 “우리나라의 산업이 계획대로 발전하자면 우수한 과학기술자들이 필요한데, 기존의 대학들을 개선하여 필요한 과학기술자를 배출하는 것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 이 사업을 경제특별사업으로 추진하시죠.”라고 대답하셨어요.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개발에 필요한 과학기술자를 양성하는 일이 꼭 필요하니 이 사업을 추진하되 과학기술처가 맡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문교부의 반대를 우회하면서 KAIST가 잉태되는 순간이었죠.
이재철 과학기술처 차관과 함께 KAIST 설립의 실질적인 청사진을 그린 롱(F.A.LONG) 박사, 터먼(Fred Terman) 미국 스탠포드 대학 부총장을 김포공항에서 맞이하는 모습. 특히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터먼 부총장은 미국 국제개발처의 요청으로 설립조사단을 조직해 KAIST 설립에 필요한 기초 조사를 했다.
임무를 완수한 저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사실 당시에 저는 뉴욕공대 교수로 부임해서 미국과학재단과 원자력위원회의 지원하에 세계 최첨단 프라즈마 발생 장치를 개발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우리 정부에서 ‘KAIST 사업이 원래 구상대로 성공하려면 당초 사업제안서를 썼던 정근모 박사가 꼭 실무 책임자가 돼야 한다’면서 KAIST 부원장직을 권유했습니다.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당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미국에서 독창적인 연구 업적을 쌓을 수 있는 여건에서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는데, 조국의 과학기술 기반 형성을 위해 하나의 밀알로서 희생해야 하는지 정말로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었죠. 그때 한 나라의 과학기술 능력이 세계 선두에 서려면 3세대가 지나야 한다는 초대 원자력원장 김법린 박사의 말씀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기초 기반을 닦는 제 1세대와 세계 수준급의 연구 활동을 전개해야 하는 제 2세대, 그리고 새로운 과학기술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제 3세대가 잘 연계되어 발전해야 한 나라의 과학기술이 선진국 수준이 된다는 말씀이었죠. 그 말씀을 곱씹으면서 ‘귀국해서 제 1세대 과학기술자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미국에 남아서 제 3세대 과학기술에 도전할 것인가’를 두고 계속 고민을 하다가 이렇게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준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KAIST 설립에 참여해서 연구실 디자인부터 교수진 확보, 미국으로부터의 원조 획득까지 많은 일을 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1971년 2월 16일, KAIST가 탄생하면서 교수 겸 부원장으로 부임했죠.
제가 KAIST에서 제일 먼저 만든 연구실이 과학기술사회연구실이에요. ‘어떻게 해야 미래 한국 사회를 과학기술 중심으로 육성할 수 있을까, 그것을 연구하자.’ 그래서 윤덕용 전 과학기술원장, 고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조경목 전 과학기술부 차관 등과 함께 과학기술정책수단 연구사업에 착수했는데, 그 프로젝트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ICT 였어요.
그 시절만 해도 우리나라 전화는 백색 전화와 청색 전화로 구분되었습니다. 청색 전화는 전화국 소유로 임대전화였고 백색 전화는 개인 소유로 매매가 가능했는데, 백색 전화 거래 가격은 웬만한 서민주택 가격과 맞먹을 정도였어요. 전화를 대량 공급하려면 먼저 전화국에 교환기를 설치해야 하는데 당시 교환기는 전량 수입에 의존했거든요. 기술빈국인 우리로서는 전화조차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설움이자 아픔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인도, 이집트, 유고슬라비아, 브라질, 멕시코 등 10개국을 방문하고 관련 기술을 연구했는데, 인도 뉴델리 전자통신연구소에서 전자반도체를 가지고 교환기를 만들고 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우리나라도 전자식 교환기 시스템을 개발하면 통신산업이 발전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귀국하자마자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으로 일하고 있던 고 김재익 박사의 집으로 갔어요. ‘우리나라도 전자식 전화교환기 개발팀을 육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더니 김 박사도 전적으로 동의하더군요.
그날 저녁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미래 기술한국을 논의한 것이 지금도 녹음 테이프로 남아 있는데, 그 후 몇 년이 지나 김재익 박사가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이 되었고, 취임하자마자 TDX(Time Division Exchange) 전자교환기 개발에 착수하도록 체신부에 지시를 했습니다. 그게 지금 정보통신 기술 강국의 토대가 된 것입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장에서 정근모 박사가 연설하는 모습. 정 박사 옆은 한스 블릭스(Hans Blix) IAEA 사무총장이다. 1989년 9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열린 IAEA 총회는 한국의 핵물리학자 정근모 박사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IAEA는 세계 각국이 원자력을 세계평화와 인류복지에 공헌하는 데 쓰도록 하기 위해 UN에서 설치한 독립기구로, 한국인 과학자를 의장으로 선출한 것은 한국의 과학기술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었다.
1982년 7월에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원자력발전소 두 개를 가동하고 있었고, 세 번째 원자력발전소를 짓고 있을 때였습니다. 첫 번째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사로부터 공급받은 고리 1호기이고, 두 번째는 캐나다 원자력공사가 지은 월성 1호기, 그 다음으로 프랑스의 선진 기술을 도입해서 울진 1호기를 짓고 있었지요.
저는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이제 우리도 기술 자립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 TMI(Three Mile Island) 사고라고 1979년, 미국 핵발전소에서 냉각장치 고장으로 인해 핵연료가 절반 이상 녹아내리는 중대 사고가 발생했어요. TMI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은 TMI 원자력발전소를 운전하는 운전원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데 있었죠. 그러니까 우리나라도 원전 시설을 안전하게 가동하려면 우리가 기술을 잘 아는 한국형 원자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984년 우리나라 정부는 원전 기술 자립 계획을 세우고 가압경수로형으로 100만 Kw급을 만들기로 했어요. 국제 입찰을 붙여서 미국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E)사가 개발한 원전 기술을 도입했습니다. 프랑스 등 원전 선진국들은 기술을 이전하는 데 난색을 표명했지만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은 기술 이전을 수락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TMI 방사능 누출 사고 이후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하면서 컴버스천 엔지니어링도 경영에 어려움이 생긴 덕분이었죠.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가 보유한 원전은 130만MW급인데 우리는 100만MW급을 목표로 했거든요. 결국 원자로 설계의 핵심 기술인 '소스 코드'를 전수받았지만 규모를 줄여야 했습니다. 새로 개발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죠. 우리 기술진은 주요 부품을 표준화하고 개량시켜서 마침내 기존 원전보다 안전성이 대폭 향상된 한국 표준형 원전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그걸 우리가 아랍에미리트에 수출하게 된 겁니다. 3세대 원전인 신고리 3, 4호기는 한국 표준형 원전에서 진일보한 것이고요.
우리나라가 보유한 한국 표준형 원자력발전소는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좋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우리가 표준형을 만들기 전에 건설된 발전소들, 즉 한국 표준형 원전 1호가 1998년 완공된 울진 3호기이니까 그 전에 건설되었던 원자력발전소들의 수명이 다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고리 1호기로 30년이 지났어요. 1978년부터 운전을 시작했는데 지금이 2013년이니까 35년이 됐고, 월성 1호기도 1983년에 발전을 시작했으니 수명이 다 됐죠. 그러니까 우리 표준형이 나오기 전에 외국에서 지어줬던 거나 제공했던 원자력발전소가 이제 늙어서 고장도 자주 나는 겁니다.
이제는 우리가 한국인의 체형과 운전 관행에 맞도록 설계하고 제작한 한국 표준형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야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숙련된 전문가를 양성하는 겁니다. 그래서 2012년에 최고 수준의 원자력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한 한국전력 국제원자력대학원도 문을 열었습니다.
1990년 12대 과기처 장관이 됐을 때는 우수연구센터를 전국에 만들었어요. 물론 그때 다 한 건 아니고, 후배 장관들이 계속 연구센터를 만들었지요. 현재 우리나라 유명 과학기술자의 대다수가 우수연구센터에서 연구한 분들입니다.
두 번째 장관은 1994년부터 1996년까지 했는데, 그때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을 설립했습니다. 영국왕립학회나 스웨덴과학한림원처럼 우리나라 과학기술 분야의 학문적 발전을 이끄는 단체이지요. 그 다음에 만든 것이 고등과학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앞서가는 연구 기능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만든 기관입니다. 이론 수학, 이론 물리, 이론 생물학 같은 기초 학문에 앞서가는 사람들을 모아서 마음대로 연구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서울 홍릉에 있던 KAIST 서울캠퍼스 자리에 만든 '고등과학원'은 현재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는 연구 기관입니다. 수학, 이론물리학 및 계산과학에서의 명성은 우리나라의 자랑거리죠.
그리고 최첨단 기술을 채택한 실험 장치를 대전 대덕에 만들었는데, 국가핵융합연구소입니다. 이것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두 차례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내며 한국 과학기술을 이끌 학문적 기반시설을 확실히 닦은 정근모 박사. 정 박사는 과학자뿐 아니라 행정가로서도 탁월한 기량을 펼쳤다.
제가 정말 감사한 것은 김영삼 대통령이 허락을 해줘서 ‘과학입국’을 선언하고 우주개발 장기발전계획을 수립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우주개발에 대한 꿈은 1970년대부터 싹트고 있었습니다. 당시 과학기술 예산의 영세성을 고려했을 때 우주개발을 하겠다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엉뚱한 일이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1970년대 초에 국방과학연구소를 근본적으로 개편했죠. 그러나 1979년 박 대통령 사망 이후 국방과학연구소의 유도탄 개발팀이 해체돼서 안타깝게도 그 꿈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그러다 제가 1995년 과학기술부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우리나라 항공우주 종합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우리가 설계하고 제작한 인공위성을 우리의 발사체로 우주 궤도에 올리겠다는 청사진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는 것을 보면 속상한 점도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우주개발계획을 수립할 때는 발사체를 우리 기술로 마련하겠다고 했는데, 그 후에 계획이 변경되면서 러시아 기술을 들여오게 됐습니다. 그때 계획한 대로 발사체를 우리가 만들었으면 로켓 기술 분야에서 지금보다 훨씬 앞서갈 수가 있거든요. 지금은 비록 미흡할지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2001년 8월, 충남 아산 화합의 마을에서 열린 해비타트 주택 헌정식에서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 대통령 부부와 함께. 1992년부터 ‘한국 사랑의 집짓기 운동 연합회’ 이사장을 맡아온 정근모 박사는 무주택자를 위한 집을 지으며 봉사와 나눔의 삶을 살아왔다. 2001년에는 지미 카터 특별건축사업(JCWP) 2001 행사를 한국에 유치하기도 했다.
봉사활동으로 해비타트(Habitat), 사랑의 집짓기 운동 연합회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해비타트 운동을 시작할 때가 1992년이었습니다. 국제 해비타트 운동을 처음 시작한 미국의 사업가이자 변호사 출신인 밀러드 풀러(Millard Fuller, 1935~2009) 씨 부부가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부부 동반으로 저녁 식사를 하게 됐는데, 운동에 동참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더군요.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을 맡고 있었기에 공무가 바빠 망설였습니다만, 해비타트 운동이 일종의 가정 살리기 운동이라는 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1992년 공식 기구로 발족하고 1994년에 의정부 지회를 결성하면서 집 없는 가정을 위해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보금자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첫 입주자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1994년 11월 의정부에서 신체장애인 부부가 처음으로 입주했어요. 당시 너무나 감격적이어서 입주자는 물론 자원봉사자들도 모두 부둥켜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지금까지 8백 세대를 지었고, 2천 세대의 집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지은 집이 5천 여 세대가 되는데 우리 젊은이들이 가난하고 힘든 나라에 가서 소중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는 일에 기꺼이 나서고, 땀의 보람을 찾고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일이죠.
사실 해비타트 운동이 우리나라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름 없이 봉사한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덕분입니다. 그 동안 연인원 1만 50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사랑의 망치’를 두드렸습니다. 한 세대의 주택을 짓기 위해서는 5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필요하거든요. 이렇게 많은 인원이 이웃을 위해 휴가를 반납하고 망치를 들고 땀을 흘렸고, 정치인과 경제인, 교육계 원로들도 여기에 동참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활동을 제가 맡아서 하고 있다는 자체가 큰 축복이지요.
저는 지금 아랍에미리트의 원자력 고문 일을 하고 있어요. 말레이시아의 과학기술 고문을 맡고 있고, 케냐의 국가 고문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들이 저에게 중책을 맡기는 이유는 제가 잘나서가 아니에요. 가난과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선진국에 진입한 우리나라를 보면서 한국의 성장 동력인 과학기술을 배우려는 겁니다.
실제로 제가 과학기술을 개발해서 다른 나라에 전수하고, 도와주는 일을 하면 그 사람들에게는 한국이 곧 희망이에요. 한류는 문화 분야에서 얼마나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까? 과학기술 분야도 한류처럼 희망의 바람을 일으킬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데, 그때를 대비해서 우리 젊은이들이 과학기술에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과학기술 공부는 재미없다고 안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재미있어요.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서요. 출세하고 돈 많이 버는 일에다 가치를 두는 사람들은 돈 잘 버는 곳에 가고 싶어 하죠. 하지만 과학기술은 꾸준하게 진리를 탐구하고 활용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일을 합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게 과학기술자예요. 이런 생각을 하고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는다면 큰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두 분이에요. 한 분은 초대 원자력 원장을 지내신 김법린 박사님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그 분이 저에게 ‘미국 가서 박사 말고 미국의 연구기관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공부해서 한국 과학계의 기반이 되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제가 평생 한 일이 그 일이에요. 그래서 그 분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분은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신데, 그 선생님께서는 과학과 음악을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그 분께 음악을 배우고, 과학 실험도 하고, 모형 비행기를 만들어서 여의도에 가서 날리기도 하고, 라디오도 만들고, 놀이처럼 즐겁게 했던 일들이 지금의 토대가 됐죠. 산 교육의 장을 그 분께서 펼쳐 주셨어요.
1998년 10월 4일. 백악관 근처의 미국 한림원 회의장에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됐다. 1864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이 만든 미국국립한림원은 학자들 사이에서 최고 권위의 상징으로, 정근모 박사는 한국 국적을 가진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미국국립한림원의 회원으로 선출됐다.
제가 프린스턴 대학교 핵융합연구소에서 공부할 때 크게 감명받았던 일이 있었어요.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는 전 세계 이론과학자들이 선망하는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가 있어서 아인슈타인 박사, 소련의 멸망을 정확하게 예측한 조지 케넌(George Kennan, 1904~2005, 외교관, 역사학자) 박사, 컴퓨터를 발명한 수학자 요한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1903~1957) 박사, 원자탄 개발의 이론적 지휘자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 1904~1967) 박사 등 20세기 이론물리학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최고의 과학자들이 모이고 교류하는 곳이었습니다.
매주 목요일 오후, 정례 물리 세미나를 열고 무슨 실험을 했는지 토의를 했는데, 그곳에 참석한 교수님 중 한 분이 제가 실험하는 모습을 보고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을 해주셨어요. 그 분은 톰 스틱스 교수님으로 플라스마 이론의 대가셨는데 어느 날 저에게 “자네가 한 실험 파일을 잠시만 보내주겠나?”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보여드렸더니 당신이 한 실험 결과와 똑같다고 제 이름으로 연구 결과를 발표하라는 거예요.
극소수긴 하지만 우리나라 교수들 가운데 학생들이 한 연구를 자신의 이름으로 올리기도 하고, 표절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자신이 한 연구도 학생의 이름으로 발표하게 하려는 톰 스틱스 교수님을 보면서 ‘교수란 저런 사람이구나’하고 감동을 했어요. 그리고 그 후 저도 인격적으로는 학생들을 이끌고, 아이디어에서는 앞서가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교수가 됐다고 멈추면 안 되죠. 항상 노력하고, 학생들이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참된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성을 기르고 친구들과의 교류를 통해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정근모 박사. 정 박사는 시험공부와 경쟁에만 매몰된 작금의 교육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최근에 한 학부형이 자기 아들이 공부를 잘 하는데 월반을 해서 과학고등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의논을 하러 저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반대했어요. 공부는 따라갈 수 있어요. 저도 2년 월반을 했는데 공부는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친구가 없다는 거에요. 공부는 안정된 정서에서 친구들과 어울려가면서 하는 것이 좋은데, 월반을 하면 늘 정서적으로 불안정하죠. 저희 어머님께서는 저에게 소년단, 청소년 적십자단, 합창단, 변론반 등 다양한 활동을 권유하셨어요. 덕분에 저는 신나게 놀면서 학교를 재미있게 다녔죠. 그런데 요즘은 애들이 매일 시험공부만 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점수는 잘 받지만 자신의 장점도 모른 채 학과를 고르고, 점수에 맞춰서 대학에 가게 됩니다.
그런 게 교육이 아니라 인성을 함양시키는 게 교육이고, 품성을 기르고 친구들과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삶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교육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들에게 ‘부모가 할 일은 자기가 못한 것을 자식에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어떤 특성과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관찰해서 잘 할 수 있는 것을 북돋아 주는 것’이라고 시간이 날 때마다 얘기해요. 아이들이 스스로 인성을 기르게 하면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제 교육관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KAIST 만든 것을 가장 큰 공헌이라고 하실 겁니다. 과정 하나하나가 엄청난 반대와 저항에 부딪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KAIST를 설립한 것은 저도 정말 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기술 후발국으로 한국형 원자력발전소 설립을 주도하고, 국제원자력기구 의장, 미국 한림원회원, 한국 한림원원장 등 원자력 에너지의 평화적인 이용을 통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바빠도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계속해 온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원봉사는 우리 사회를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니까요.
돈이 많아도 불행하고 가족끼리 싸우는 집도 많은데,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 시간을 내서, 자기 돈을 들여서 힘들게 땀을 흘려가면서 이웃을 돕습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어요. “누군가를 위해서 무엇을 해준 것이 아니라 봉사활동을 통해서 자신이 가장 많은 것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걸 보면 자원봉사라는 것이 우리 사회를 아름다운 사회로 바꾸는 핵심이 아닌가.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IT산업 발전 간담의 장에서 마이크로 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William H. Gates)와 함께. 정 박사는 수많은 공직을 거쳤지만 인자함과 겸손함으로 세계적인 인물들 사이에서도 높은 평판을 얻고 있다.
21세기에는 우리나라가 초일류 국가가 되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한국’ 하면 ‘희망’의 메시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나라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지금의 젊은이들이에요.
학교 공부도 중요하지만 젊은이들이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교류를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시험을 볼 때도 ‘옆 사람 것을 보지 말라’는 경쟁 구도가 아니라 ‘옆의 사람과 의논해서 공동 작품을 만드는 것을 누가 잘 하나?’ 하는, 협동심을 키워주는 시험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는 자기 스스로가 보기에도 ‘그렇지. 나의 삶은 이렇게 되어야 되겠지’하는, 겸손하면서 온유하고 봉사하면서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산다면 몇 년을 살겠어요? 사는 동안 자기 자신이 정직하게 판단해 볼 때 ‘자신이 맡은 바 열심을 다하고, 이웃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화합을 하면서 살아갔다’고 한다면 너무나 감사한 일 아닐까요? 그 대신에 맡은 바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야죠. 이런 바탕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비전을 갖고 한반도, 아시아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나가서 일을 해야 돼요. 그러니까 전 세계를 품을 수 있는 넓은 아량과 자기의 꿈을 갖는 젊은이가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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