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피로사회.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는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는 문장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이 시대의 철학적 진단을 통해 우리사회의 뇌관을 건드린다.
그가 우리 시대에 내린 진단은 피로 사회는 자기착취의 사회이고,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것이다.
자기착취라. 사회의 뇌관에는 나의 뇌관 역시 닿아있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 산물인 성과사회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계속 갈구한다. 현대의 사회는 더 큰 성과를 올려서 더 큰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망을 부추긴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전체적인 생산성을 극대화해가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역시 이러했다.
아니, 우선 내가 바라보는 내가 이러했다.
만족유예라는 법칙이 있다.
‘마시멜로 이야기’에서도 소개되었다.
그 이야기에서는,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네 살짜리 아이들을
대상으로한 실험내용을 언급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마시멜로를 주고 15분 후까지 먹지 않으면
하나를 더 주겠다고 약속 했다. 그후, 그 아이들을 추적해,
곧바로 마시멜로를 하나 먹은 아이들과 15분을 참아서
두 개를 먹은 아이들을 비교했다.
그 결과 15분을 참았던 아이들이 학업 성적도 우수하고,
친구관계도 원만하고. 스트레스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즉, 만족유예의 법칙은 더 큰 만족과 보상을 위해 당장의
욕구 충족을 미룰 줄 아는 의지는 성공을 견인하는 지표다.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 그러니까 ‘뭣도 모르고’ 남들 따라하기
바쁜 시절에 나 역시 유예를 미덕으로 삼았다.
아니, 어쩌면 유예의 법칙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명령에
순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판단능력이 부족한 ‘보통의 존재’인
내가 할 수 있는 평범한 선택이었다.
기다리며 더 큰 보상을 바라는 것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우리사회의 ‘문화 자본’이다.
하지만 문제는 자아형성 이후에 터졌다.
‘하늘은 왜 파래요?’, ‘원숭이 엉덩이는 왜 빨개요?’, ‘외계인은 있나요?’
따위의 유아기적 호기심을 넘어서,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할까?’. ‘정말 이대로도 괜찮은가?’
따위의 사춘기적 고민이 방향없이 흘러가던 나의 사유를 붙잡았다.
때는 인생에서 가장 빛나야할 시기 스무살.
그 시절 나는 마시멜로 두 개를 소유하기 위해
컴컴한 독서실에서 스탠드를 하나 켠 채,
EBS에게 구애를 펼치고 있었다.
‘대학’이라는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해줄 왕자님을 기다리며…….
아. 물론 오해 없으시길. 나는 만족유예의 법칙이 그르거나
윤리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만족유예의 법칙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다.
그 의문은 ‘먹고 살만 할 때도, 유예시킬 필요가 있나?’ 이다.
물론 인간의 목적이 먹고 살기 위함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만족스러운 상황이라도
더 높은 이상향을 추구하며 그에 맞춰 가시밭길을 걸어가겠다면,
나는 그를 응원해 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런 것 같지는 않더라,
사실 재수 시절의 나부터가 그렇지 않았다.
재수 시절의 나는, 아니 스무살 시절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었다.
물론 모든 스무살이 그렇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배우고,
경험하고, 깨달으며 자신만의 삶을 작곡해 나간다.
하지만 스무살의 나, 할 줄 아는 것은 오지선다형 문제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 뿐이었던 나는 무서웠다.
준비되지 않고 기댈 것 없는 내가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모든 것이 너무나 막막했다. 그래서 독서실에 나 자신을 가뒀다.
도피적 선택이었다. 하던 일이나 계속하기로 했다.
이러한 나의 선택에는 ‘긍정성’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도 영향력을 미쳤다.
'불가능이 어딨어? 안되면 되게 해야지!'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사실, 창피하지만 독학재수 기간에 나는 ‘수능만점자’ 인터뷰하는 상상도 했다.
하루에 열네시간은 너끈히 앉아 있는 ‘나’이기에,
‘도둑놈 심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도피적 선택이고 차선의 선택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높은 곳을 향해 도전 중 이었다.
설사 나의 왕자님을 기다리는 선택이었지만.
한병철 교수는 우리 사회를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라 파악한다.
그는 이 책에서 현대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냉전, 면역학, 규율사회)에서 그러한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후 일어났다는 것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 새로운 사회를 성과사회,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성과주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이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Yes, we can!”).
그러나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한병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긍정성‘이 자기착취로 이어진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자기착취는 기만적인 자유의 느낌을 동반하는 한에서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기착취와 긍정성의 사회적 분위기가
신경성 질환들, 이를 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고 규정한다.
물론 합리적인 ‘긍정성‘은 중요하다. 하지만 논리와 방향이 결여된 긍정은 ’낙관’일 뿐이다.
‘열 네시간씩 공부하면 수능 만점 맞겠지?’는 논리성이 없다.
‘서울대가면 나의 꿈이 이루어 지겠지?’는 방향성이 없다.
나의 스무살은 사회의 전체적인 생산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자본주의의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생산과 소비를 다람쥐 쳇바퀴처럼 무한히 반복해야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적되는 만성피로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세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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