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수능 썰
수능 썰은 난생 처음 써 봅니다. 이하 평어체. 문학보단 비문학(이라 쓰고 키배라 읽는다)이 특기라 재미가 다소 떨어질 수 있음을 양해. 서두에 15수능 이과에 대해 소개하자면, 08수능 이후 최악의 개쓰레기 수능이었다. 변별도 개판이어서 이론적으로는 극상위권들이 좀만 더 설의로 쏠렸어도 만점자가 탈락할 수도 있었고, 전영역에 걸쳐 추론능력 사고력 논리력 통찰력따위의 고차원적인 학업능력을 쌈싸먹었다. 6, 9평 수B가 무난하게 나와서 위기의식을 못 느껴 적당히 백분위 고정 99 이상 받을 정도로만 공부했음에도, 그 공부마저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국수영 변별력이 거의 없어서 과탐 표점, 백분위 1이 소중한 판국인 게 투과목 응시자 입장에서 재앙이었다(나의 투과목 부심은 여기서부터 우러나온다). 14현역 땐 재수생한테 치이고 15재수 땐 현역한테 치인 나는 뭔 죄인가 싶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9평을 기점으로 11월 모의고사까지 나락의 연속이었다. 모의고사 성적이 계속 연고대 정도로 나왔는데, 집안 사정 때문에 서울대 점수 안되면 점수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대학에 가야 해서 나날이 좌절감이 커졌다. 그랬던 두 달간 뽕을 맞을래야 맞을 수가 없어서 수능 전날까지 공부를 놓지 않았다. 왠지 수능 때 국어a형이 1컷 94로 나올 것 같아서 수능 전날에 12수능 언어 한 번 풀고, 엡실론 모의고사라고 성대 수교과생들이 만든 온라인 모의 뽑아서 풀다가 계산이 복잡해서 집어 던졌다(15수B를 생각하면 최고의 선택이었다 ^ㅗ^). 저녁에는 화학2에 대비하여 뭘 봤는진 몰라도 하여튼 뭐 설렁설렁 봤던 걸로 기억하고, 자기 전에 파렉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9평 때 물리1 20번 찍어서 50(99) 받아 놓고 물리1은 할 거 없다고 치부해서 대충대충 공부했는데, 돌이켜보면 이는 내 생애 큰 실수 중 하나다.
현역 때도 그랬듯 수능 당일에 마음을 비울 수 있었다. 두 달간 실패를 거듭하니 되려 불확실한 미래에 초연할 수 있었고, 현역 때 대책 없이 친 14수능도 당해 치른 모의고사들에 비해 결과가 좋아서 나는 큰 시험에 강하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고사장에 가는 길에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조우해서 목적지가 같다는 걸 수능 당일에서야 알았는데, 걔가 뭘 잘못한 건 아니지만 날이 날이다 보니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 자체가 탐탁찮았다. 그래서 은근 철벽쳤다.
고교-재수 친구 한 명과 같은 고사실에서 시험을 보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 우리는 합의라도 한 듯 서로 신경을 쓰일 만한 행동을 일체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눈도 딱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이는 프로수험생으로서 만점을 받을 만한 태도다. 본받는 게 좋다.
1교시 국어시간 전까지 꽤 시간이 있었지만 설마 그 정신상태로 공부를 하려는 시도는 안 한 걸로 기억한다. 국어 시험지가 배부되기 직전까지 시험에 도움이 되리 정도로 적당한 긴장감이 섞인 채 평정심을 유지했다. 당시 화작문이 올해 평가원에 비해선 훨씬 쉬웠지만, 은근 전년도에 비해 선지구성이 짜증나게 나와서 시간을 좀 들여 16분에 걸쳐 마무리했다. 다음 비문학은 죄다 지문-선지 일대일대응 능력을 요구하는 문제들로 구성되어서 쉬웠다. 다만 두 문제 정도가 신경 쓰였는데 그 중 하나는 28번 어휘 문제로, 결과적으로 이 놈도 물1만큼이나 내 인생에 나쁜 쪽으로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문학이 꽤 까다로웠는데 2000년대 언어영역과는 다른 방식으로 짜증났다. 한 바퀴 돌 때까지 비워 놓은 문제들이, 특히 무영탑에서, 상당히 많았고 45번 답을 고른 후 시계를 쳐다보니 25분 남았더라. 다시 한 바퀴 돌고 나니 28번, 무영탑 두 문제 빼곤 다 답을 확정지은 상태여서 어리석게도 답 개수를 확인했다. 한 선지에 12개씩이나 쏠린 걸 확인했는데, 9평 때도 답 개수 센 다음 무시해서 틀린 문제가 떠올라서 불안했다. 28번 답을 최종적으로 고를 때 이게 내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무영탑 42번은 옿은 것을 찾는 문제여서 틀린 선지가 왜 틀렸는지는 제대로 못 찾았지만 정답의 근거는 얼추 찾아내서 마킹했다. 주변 반응은 어려웠다는 눈치였지만,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추론능력을 요구한 문제가 전혀 없어서 나는 1컷을 97로 점쳤다.
2교시 수학은 6, 9평 당시 컨디션 같았으면 30분만에 다 풀었겠지만 왠지 천천히 풀고 싶었다. 29번까지 35분이나 썼고, 30번도 39 내는 데까진 10분 안 걸린 걸로 체감했지만 불안해서 한 30분간 검산했다. 그후 첫번째 검토를 했는데 29번 정사영 문제에서 tangent가 3/4라고 답을 3+4=7 한 걸 발견하고 식겁해서 얼른 9로 고쳤다. 딱 봐도 1컷 100이지만 제발 96이길 바랐다.
아침에 만난 친구가 점심시간에 나를 찾아왔다. 나는 막연하게 혼자 있고 싶다고 했지만 시험 얘기 안 하겠다고 다짐해서 같이 점심 먹었다. 그외 다른 고교-재수 친구들을 마주쳤고, 먼저 수학 쉬웠지 않냐는 말을 하자 나도 조심스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중 한 명은 30번 버리고 다른 거 하나 실수해서 92지만 1컷보다 4점 낮은 거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쾌활하게 말하던데, 나는 당연히 그 친구에게 내 짐작을 밝히지 않았다.
타고난 막귀인데 하필 맨 뒷자리로 배치 받았다. 그 때문인지 영어 듣기 때 두 문제가 아리송했는데, 9번인가에서 Where인지 When인지가 헷갈렸지만 과단성있게 답을 골랐다. 독해는 당해 기조에 반전 없이 ebs 연계 100%에 무난의 끝이었다. 혹시모를 뒤통수에 대비해서 오르비 하이퍼 빈칸추론 문제집 푼 게 그닥 도움이 안 된 느낌.. 하여간 수학, 영어는 쓸 것도 없다.
영어 끝나고 같은 고사실의 친구가 드디어 긴장을 덜은 듯 말을 걸었는데, 예상대로 영어 듣기 얘기랑 국어가 어렵지 않았느냔 말이었다. 나는 친구의 반응이 어떨지 몰라 1컷이 94~97일 것 같다고 했고, 역시나 97에는 손서리를 치더라.
이제 빌어먹을 물1 시간이다. 물1 좀 하는 애들은 누구나 그렇듯 1~3페이지는 신속히 풀었고 4페이지도 20번 빼고 순탄히 풀었다. 국어 예상결과를 괜히 비관해서 물1을 만점 받겠다는 강박감이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남은 시간을 20번 푸는데 할애했고, 긴장이 심하다 보니 돌림힘 계산할 때 멍청하게 받침대가 물체에 가하는 돌림일을 쳐더하고 자빠졌다. 당연히 풀릴 리가 없었고, 별 수 없이 답 개수 세알린 다음 쏠린 선지에 해당하는 문제 위주로 검토해 나갔다. 마지막까지 20번은 비비지도 못했고, 작년에 20번을 1번으로 찍어 맞힌 걸 생각해 1번으로 찍었다. 답 개수가 한 선지에 쏠린 걸 보며 불길함을 느꼈다.
화2는 지금 쓰면서 드는 생각인데 국어같이 짜증났다. 1컷 47이었던 9평보다 체감상 훨씬 부담스러웠는데, 14화2처럼 수리적으로 예쁘게 조지지 않고 문제 하나하나당 소요시간이 적잖이 들게 하는 유형들로 구성되었다. 준킬러로만 구성된 수B를 50분컷해야 하는 중압감과 비슷했다. 나는 머리가 좋아서 평소대로 많은 단계를 머릿속으로 거친 다음 손계산을 했음에도 다 푸니까 23~24분이나 경과했다. 별 수 없이 답 개수에 의존하여 쏠린 선지 위주로 검토해서 3갠가 잡아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18번만 답을 바꾸면 답 개수가 예뻐질 것 같았지만 도무지 틀린 점을 못 찾겠더라..
고사실에서 나오자 재종 화2 친구가 화2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나는 "이 정도면 1컷 44~45 나오겠지?"라고 마음에도 없는 낙관을 했다. 고사장에서 나오자 아침에 만난 고교 친구가 따라붙었다. 같이 걸으며 곰곰히 생각해 보니 수학, 영어는 다 맞힌 것 같은데 국어는 42번이랑 등등 해서 6점은 깎인 것 같고 물1은 못 푼 것도 있고 화2는 걍 망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oo대(집 근처 대학) 가야지"하며 몇 번을 거듭 자조했다.
집에 도착해서 어떠한 종류의 설레발도 치지 않았다(이 점은 아직까지도 자랑거리로 여긴다). 쑤시는 허리를 좀 편 다음 순차적으로 나오는 답지를 받아서 가채점해 보니 국어는 36번을 1번 했는지 안 했는지 아리까리해서 98 아니면 낮은 확률로 96이었고, 영어는 조금 긴장하며 매겼지만 100점, 물리1은 41점, 화학2는 47점 나왔다. 가채점 예상커트라인(97 100 98 45 46~47) 보니 물리 41이 발목을 크게 잡을 것 같았다. 되게 아쉬워서 틀린 문제 분석을 해 보니 사실 44점이더라. 9번은 왜 틀렸나 보니 시험지에 답 체크를 잘못한 걸 그대로 omr에 옮겼다. 이 문제에 대한 미련은 아직까지도 후유증으로 잔존한다. 수능 전에 물리1 공부를 착실히 해서 20번을 풀어냈거나, 아예 20번을 포기했으면 안 틀렸을테니 내 불찰도 있지만.. 원점수상으론 상당히 높았지만 예상컷을 봤기에 전혀 기쁘지 않았다, 마치 앞으로의 고뇌를 예상키라도 한 듯..
하여간 지금 생각해도 참 개같은 수능이었다. 뭐가 더 어렵다 부심은 부질없다 쳐도, 뭐가 더 개같다 부심은 충분히 논의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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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15수능 이과는진짜 개같았던거 인정...
수학이랑 영어 풀다가 어이없어 하던 제 모습이 기억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