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국어 42번 선지 3번에 대한 의견
제 (잠정적인) 결론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의 3. 되돌아보기의 마지막 여섯 줄 정도를 읽으시면 됩니다.
============
이번 수능 국어 42번 선지 3번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예를 들어
http://dotheg.com/221400173453
등등처럼 말입니다. 그러면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과 존재함축에 대한 얘기도 나오고, 가능세계 의미론에 대한 얘기도 나오고, 양상논리가 다른 논리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얘기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한편 저는, 제시문과 보기 자체에 보다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텍스트에 대한 일종의 내재적 읽기이기도 한데, 이를 통해 논의가 보다 진전될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1. 들어가면서
먼저 수능 제시문은 필연성과 가능성에 대한 진술을 가능세계(에 대한 양화)를 통해 분석해볼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정도입니다.(스케치만 제시했다고나 할까요) 그렇기에 수능 제시문만을 읽은 수험생의 입장에서는 일반적으로 양화를 다루듯이 가능세계에 대한 양화를 다루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판단하였고(따로 단서가 없으니까) 아래의 추론은 모두 그런 식의 추론입니다.
추론에서 사용될 가정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가능세계의 일관성 : 임의의 명제 p에 대해, p가 가능하지 않다면, p가 참인 가능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능세계의 완결성 : 임의의 가능세계 w에 대해, 임의의 명제 p에 대해, w에서 p가 참이거나 w에서 ~p가 참이다.
가정1 :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의 부정은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이고,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 의 부정은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 이다. 또한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의 부정은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쓴다"이고,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쓴다"의 부정은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이다.
가정2 : ~p가 참이다 if and only if p가 거짓이다.(~p가 참이면 p가 거짓이고, p가 거짓이면 ~p가 참이다.)
여기서 가능세계의 일관성과 완결성은 수능 제시문의 것을 paraphrase한 것이고 가정1과 가정2는 수능 제시문과 보기에 명시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두 가정은 거의 모든 고등학생이 배우는 고등학교 1학년 수학에서(더 구체적으로 명제 단원에서) 제시되고 있기에, 저는 이것을 수능 제시문을 읽는 사람의 배경지식에 포함된다고 간주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지 3번은
선지 3번 : 가능세계의 완결성에 따르면, 임의의 가능세계 w에 대해, w에서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이거나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참이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추론들
A.
가능세계의 완결성, 가정2에 따르면, 각각의 가능세계들은 다음의 두 종류 중 하나입니다.
1번.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인 가능세계
2번.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거짓인 가능세계
마찬가지로 1번 종류의 가능세계는
1-1번.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이고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참인 가능세계
1-2번.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이고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거짓인 가능세계
의 둘 중 하나이고 2번 종류의 가능세계는
2-1번.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거짓이고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참인 가능세계
2-2번.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거짓이고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거짓인 가능세계
의 둘 중 하나인데, 보기와 가능세계의 일관성에 따르면 1-1번 유형의 가능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결국 각각의 가능세계들은 다음의 셋 중 하나입니다.
1-2번.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이고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거짓인 가능세계
2-1번.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거짓이고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참인 가능세계
2-2번.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거짓이고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거짓인 가능세계
그렇다면 가능세계의 완결성, 가정1에 의해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거짓인 세계에서는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참이고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거짓인 세계에서는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입니다. 따라서 위의 1-2번과 2-2번 종류의 세계에서는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이고 2-1번과 2-2번 종류의 세계에서는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참입니다.
각각의 가능세계는 1-2, 2-1, 2-2번의 셋 중 하나라는 것이 보기의 내용이므로, 결론적으로 어느 가능세계에서든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쓴다"와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 중 하나는 참이고, 이것이 ③의 "가능세계의 완결성에 따르면," 이후의 내용이 됩니다.
B.
보기에서 다음이 제시되었습니다.
(가)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와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모두 참인 것이 가능하지 않다.
가능세계의 일관성에 의해 이는
(나)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와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모두 참인 세계는 없다.
과 같고 이는 다시
(다) 각각의 가능세계에서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이 아니거나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참이 아니다.
와 같습니다. 그런데 가능세계의 완결성, 가정1에 의해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이 아닌 가능세계에서는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참이고,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참이 아닌 가능세계에서는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입니다. 따라서
(라) 각각의 가능세계에서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이거나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참이다.
가 얻어지고, 결론적으로 ③의 "가능세계의 완결성에 따르면," 이후의 내용이 됩니다.(더 나아가 수능 제시문에 있는 무모순율과 가능세계의 일관성을 이용하면 (다)와 (라)가 같은 말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3. 되돌아보기
A와 B는 선지 ③의 "가능세계의 완결성에 따르면" 이후를 제시문과 보기로부터 추론한 것이고, 이 중 적어도 하나 이상은 평범한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것은 가능세계라는 새로운 것에 대해 생각할 때 따로 주의할 것 없이 평소처럼 하면 된다는 판단, "마치 경우의 수를 세듯이 하면 된다"는 판단 하에서 이루어진 추론이기는 합니다.(물론 제시문과 보기만 주어진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가능세계의 일관성입니다. 계속 생각해 보아도, 선지 ③의 "가능세계의 완결성에 따르면" 이후를 가능세계의 일관성을 사용하지 않고 추론할 수는 없는 것 같고, 선지 ③의 "가능세계의 완결성에 따르면" 이후를 추론하기 위해서는 가능세계의 일관성과 완결성이 모두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선지 ①은 "가능세계의 완결성과 독립성에 따르면,"으로 시작합니다. 이로부터 출제진은 선지 ③을
a. 가능세계의 일관성과 완결성에 따르면, 어느 세계에서든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쓴다."와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 중 하나는 반드시 참이겠군.
과 구별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평가원에서 정말로 적절한 것은 선지 ③이 아니라 위의 a이고 그렇기에 복수정답은 아니라고 대응할 수 있을 것 같고, 이쪽이 상당히 유력해 보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까지가 그나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4. 약간의 추가
예를 들어 위의 B의 (나)에서 (다)로의 추론은 ~(p and q)로부터 ~p or ~q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원리에 의한 추론인데 이 원리는 직관 논리에서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수능 제시문에서는 모순 관계를 통해 부정을 정의한 것이 아니라, 명제의 부정이라는 것은 이미 있고 그것이 모순 관계의 사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의 부정은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라는 것과 위에서 언급한 가능세계의 완결성을 가정한다면, 둘 중 하나는 참이어야 합니다. 즉 A, E, I, O 전부를 진리치 공백으로 보는 해석은 수능 제시문과 상충할 것 같아 보입니다.
대략 말해서, 루카시에비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언논리에서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일 때 존재함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논의에 등장할 때 존재함축을 가진다는 해석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이 견해가 상당히 널리 수용되었지만(예를 들어 벤슨 메이츠의 『기호논리학』 11장 등등) 이에 대한 반대가 없지도 않습니다.
어쨌든 확실한 건 보기에서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와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모두 참인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는 것이고, 이로부터 보기는 학생이 존재하는 가능세계만을 고려하고 있지 않나 하는 심증이 들기는 합니다.(루카시에비치 식 해석이 이쪽에 가깝기는 하겠지요)
일단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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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간절했었는데 공허하다 지금은...
의견 감사합니다. 이의신청 기간이 마감되었다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다만 '3번 선지의 두 명제를 모순 관계로 생각한 경우는 오류이고, 제 글처럼 추론하였다고 하더라도 완결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완결성과 일관성에 의한 추론이므로 3번을 복수정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대답도 뭐 가능하기도 하고(아주 깔끔하지는 않더라도) 평가원이 이렇게 대답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 같네요.
간단히 정리하자면
위 글에 제시된 추론과정에서 '가능세계의 완결성'은
가능세계의 전체집합을 상정하는데 쓰였다는 것이군요.
그런데 출제자는 참 거짓을 판단하는 데 '가능세계의 완결성'이 활용되었나 이렇게 묻고자 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를 이유로 평가원은 아마 이상 없음으로 판단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와 별개로 솔직히 이런 식의 애매한 진술은 그냥 넘어가는게, 수험생이라면, 수험생에게도 좋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평가원은 제기하신 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지문 완성도와 선지 명료성의 결여를 따져물을만한 지문과 문제들을 꽤 많이 냈는데 한 번도 언급을 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학생들도요.
수능 국어 영역에서 최선은 그냥 가장 정답이라고 불릴만한(?) 걸 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끔 하네요.
사실 뭐 모든 수능 문제가 늘 명료하지는 않았지요. 수험생의 입장에서라도 3번보다 4번의 도출이 보다 간단하기 때문에 선택하라고 하면 4번을 고르는 것이 적절할 테고요.
다시 살펴보니 "가능세계의 전체집합"을 상정하기 위해서는 가능세계의 완결성만이 아니라 가능세계의 일관성도 필요해 보이고, 이 점 때문에 3번이 복수정답이 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생각난 것인데,
평가원은
지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내용은 배제해야 성립하는 문제들을 지금껏 다수 출제해왔기 때문에 복수 정답 처리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과학이나 논리학에 관한 지문에서의 문항에서는 '지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내용을 배제하고 생각해야 답을 낼 수 잇다'는 특징이 더 두드러지고요
다른 분들의 분석의 경우에는 제시문이나 보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참조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 저는, 최대한 지문과 보기 내에서 생각하면서 3번을 도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했지요.
위에서 언급한 가정1과 가정2는 지문과 보기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수학의 명제 단원에서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가정1과 가정2는 수험생의 평균적인 배경지식 또는 상식에 포함된다고 보았고, 그렇게 볼 때 선지 ③의 "가능세계의 완결성에 따르면" 이하는 제시문과 보기 내에서 추론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일관성과 완결성에 의한 추론이라는 점 등등 때문에 복수정답이 되지 않을 가능성도 꽤 있겠다 싶고요.
혹 'A에 따르면 B'을 A를 충분조건이 아니라 INUS조건처럼 해석할 여지는 없을까요? 고등학생이 치는 시험임을 감안한다면 '따르면'을 다소 느슨하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말해, 'A에 따르면 B'를 1)A 단독으로 B가 참임을 함축한다로 해석하는가, 아니면 2)B가 참이라고 판단할 때 A에 근거했는가로도 해석할 수 있는가 여부도 다툼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2)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면 여전히 유효한 이의제기일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이 부분은 국어학의 영역일 수도 있습니다.)
"A에 따르면 B"가 A 단독으로 B가 참임을 함축한다는 것으로 쓰이기보다는 적절한 그리고 사소한 보조 가정과 함께 A가 B를 함축한다는 것으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가능세계의 일관성이 반드시 필요해 보이고(사소한 것도 아닐 테고요), 무엇보다
선지 1번이 "가능세계의 완결성과 독립성에 따르면"으로 시작한다
라는 점이 걸립니다. 선지 3번을 "가능세계의 일관성과 완결성에 따르면"으로 시작하지 않고 "가능세계의 완결성에 의하면"으로 시작한 것이 평가원의 의도일 수 있으니까요.
의견 감사합니다. 저도 그 점이 마음에 걸리긴 합니다.
3이 정답이기 위해서는 가능세계의 완결성에 더해 '일관성에 따르면'이라는 조건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는 님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현재로서 이게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인 것 같습니다.
3번 선지는 사실상
가능세계의 완결성에 따르면,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쓴다"와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모두 거짓인 가능세계는 존재하지 않겠군.
과 같은 말이고, 이렇게 볼 때는 '일관성에 따르면'이 3번에서 누락된 것은 상당히 결정적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학생이 없는 가능세계를 배척하기 위해서는 일관성 조건이 필요한 것 같네요. 이제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다) 각각의 가능세계에서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이 아니거나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참이 아니다.
와 같습니다. 그런데 가능세계의 완결성, 가정1에 의해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이 아닌 가능세계에서는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참이고,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참이 아닌 가능세계에서는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입니다.
=> 제가 알기로, P ~P 관계에 대해 지문에서 설명되어 있는 것은 동시에 참이 될 수 없고 (무모순율) 임의의 가능세계에서 동시에 거짓이 될 수 없는 (배중률) 관계라는 사실 뿐입니다. 그 외의 사실은 전부 배경지식입니다.
=> 가정1에 대해 : 현대 논리학에서는 각각의 명제가 엄밀한 부정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즉, A가 참이면 O가 거짓이고 E가 참이면 I는 거짓입니다. 그러나 고전논리학에서는 A가 거짓이라 해서 O가 참이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학생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A와 O 모두가 거짓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의 부정은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이고,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 의 부정은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 이다 – 이 가정은 현대논리학의 토대 위에서 타당합니다. 문제는 보기가 현대논리학의 관점을 배제한다는 사실입니다.
모순 관계에 놓인 두 문장은 반드시 배중률과 무모순율을 만족해야 합니다. 지문에 그 외의 사실은 없습니다.
=> 한 편, A의 부정은 O라는 것만을 '배경지식'으로 알고 있는 학생은 지문의 ‘포괄성’에 의거, 학생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때, 그는,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 (학생이 존재하지 않으면 참)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 (학생이 존재하지 않으면 거짓)
이라고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문에 근거하여 해석할 것입니다.
그는 1. A와 O가 부정관계라고 생각할 것이고 2. 임의의 가능세계에는 학생이 없는 가능세계도 포함되며 3. 이 가능세계에서도 A, O 중 하나는 그리고 하나만 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서서 그는 반대관계에 놓인 명제 두 개가 동시에 참이 될 수도 없다는 서술을 보고 당황할 것입니다. A와 E는 학생이 존재하지 않을 때 동시에 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려면 제 3의 가능성 – A와 O 모두가 학생이 존재함을 함축한다고 이해하고, A의 부정은 O이거나 학생이 존재하지 않는다, O의 부정은 A이거나 학생이 존재하지 않는다 –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거짓이다로부터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쓴다가 참이다 –를 이끌어낼 수 없겠죠. 학생이 존재하지 않을 제 3의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제3의 가능성에서 보기의 A와 E는 모두 거짓이 되는데 보기에서도 나란히 거짓이 될 수는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수험생 수준에서 무리한 추론임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지문’에서 P ~P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는 것은 배중률과 무모순율이 전부입니다. A-O E-I 사이에 완전한 모순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일단은 배경지식입니다. 지문에 충실하게 읽으면 굳이 ‘일관성’을 통하든 통하지 않든 3번 선지는 답이 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정1은 고등학교 수학2 집합과 명제 중 "모든'이나 '어떤'이 있는 명제'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를 고전논리학/현대논리학 구분을 근거로 배제한다면, 평범한 고등학생에는 이러한 배제가 오히려 배경지식으로 보일 것 같습니다.
이해황님, 저도 이해황님 말씀에 백번 동의합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라도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의 부정이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 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존재 함축 따위의 문제는 고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문제가 저렇게 나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상의 학생들처럼 P ~P를 생각할 경우, 반대 관계에 놓인 명제는 동시에 참이 될 수 없다 - 는 보기 서술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고요.
고등학교 교과서를 충실히 읽은 학생들은 누구라도 A-O는 모순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고 현대논리니 고전논리니 하는 것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A의 모순이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가능세계를 포괄하는 의미에서) O가 되기 위해서는 현대논리의 관점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배경지식에는 그런 행간의 숨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문과 보기를 통해 복잡하게 짱구를 굴릴 경우 무엇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어쨌든 눈치챌 수는 있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일반적인 고등학생한테 요구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론적으로는 그것이 가능하다 이겁니다. 보기를 읽고, 그럼 학생이 존재하지는 않겠네 - 를 떠올리는거나 그럼 학생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도 모순관계의 어느 한 쪽에는 포함시켜야겠네 - 를 떠올리는거나 모두 심화적인 생각을 요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후자의 생각이 지문의 '포괄성' 서술에 조금 더 부합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는 점일 것이고요. 42번 문제는 나쁜 문제, 출제자의 배려가 없는 문제, 정말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될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번 선지가 복수정답으로 인정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당연시하는 상식을 적용했을 때 사실 그 상식에는 행간의 숨은 사실이 있었고 그 행간의 숨은 사실을 학생들이 (당연하게도) 간과하여 3번이 정답 아니야?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쨌든 그 상식이라는 것이 지문에 쓰여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정1이 지문에 명시된 내용이라면, 아니 현대논리라는 거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그걸보고 무슨 수로 그런 생각을 하란 말이냐 - 다퉈볼 여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1은 지문에 쓰여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학생들이 그저 대부분 전제하는 상식일 뿐이고, 다시 말씀드리건대 거기에는 숨어있는 몇 가지 복잡한 이야기들이 있었던 것이고요.
물론, 나카렌님의 말씀처럼 완결성 뿐 아니라 일관성도 통해야 하므로 3번이 틀렸다는 것이 평가원의 출제 의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문제는 나쁜 문제가 아니고 또 평가원은 정말 대단하다는 말씀 밖에 못 드리겠는데, 정말 그럴까요? 제 생각에는 그냥 단순하게, 3번 선지의 명제가 완결성을 충족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3번을 거르라는게 평가원의 출제 의도였을 것 같습니다. 이건 그냥 홀수형에선 3번 선지가 정답선지보다 먼저 배치되어 있는데 짝수형에선 그렇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평가원이 저런 걸 의도하고 이 문제를 냈으면, 홀짝수형을 그런 식으로 차이를 두어 구성하는 건 정말로 정신나간 짓이겠죠. 그리고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평가원의 의도대로 풀어서 맞추거나 아니면 부정관계가 아닌걸 부정관계로 착각해서 틀리거나 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정말 정말 대단한 수험생들이 고차원적인 생각을 통해서 3번을 답으로 골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는 이런 생각에 콧방귀를 뀌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런 대단한 수험생들이 실제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학생들이 오히려 이 문제를 틀린다면 그것은 굉장히 불합리한 일이라는데에는 저도 동의합니다만, 글쎄요. 이 수험생들에게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제 생각에는 3번이 복수정답으로 인정되기는 아주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언어영역 출제매뉴얼에는 "주어진 텍스트 안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되, 일반화된 상식이나 기초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도 측정하도록 출제한다"라고 나옵니다. 배경지식과 일반화된 상식이나 기초지식 간 경계가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인문계/자연계 학생 모두가 배우는 내용이라면 일반화된 상식이나 기초 지식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 수능 제시문에서는 "셋째는 가능세계의 완결성이다. 어느 세계에서든 임의의 명제 P에 대해 “P이거나 ~P이다.”라는 배중률이 성립한다. 즉 P와 ~P 중 하나는 반드시 참이라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임의의 가능세계에서 P와 ~P 모두 거짓이지 않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임의의 가능세계에서 P와 ~P 중 적어도 하나가 참이다"라고 했다는 것이고, 본문에서 저는 이를 따랐습니다.
2. 저는 다음과 같이 이해했습니다.
먼저, A와 O가 서로의 부정이고 E와 I가 서로의 부정이라는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수학 교과서의 논리학 내에서 성립하지만, 보기 내에서도 그런지는 알 수 없다.
한편 학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므로, 학생이 존재하지 않는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이 가능세계에서는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쓴다'와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모두 거짓일 것이다. 그리고 O의 부정이 A이고 I의 부정이 E라면, 이는 보기와 모순된다. 따라서 합리적인 해석을 위해서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데, 그 중 하나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는 학생이 존재하고 또한 존재하는 모든 학생이 연필을 쓰는 가능세계에서만 참이고,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는 학생이 존재하고 또한 존재하는 모든 학생이 연필을 쓰지 않는 가능세계에서만 참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보기에서 제시한 반대 관계는 그대로 성립하고, 학생이 존재하지 않는 가능세계에서는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쓴다', '어떤 학생은 연필을 쓰지 않는다' 모두 거짓이다. 따라서 3번 선지는 적절하지 않다.
이 제안은 분명 여러 장점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수능 제시문에 있는 가능세계의 포괄성과 보기의 내용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는 제안이고, 그 자체로도 충실하면서 일관적인 해석으로 보입니다.
다만 기술자君님이 말하는 대로 이것이 수능에 응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또는 적절한) 접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문항 자체의 난점일 수도 있겠고요.
3. 적어도 영어권에서 classical logic은 19세기에 이루어진 변화 이전의 논리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배중률, 모순율, 등등등이 성립하는 논리학을 가리킵니다. 대신 19세기에 이루어진 변화 이전의 논리학은 traditional logic이라고 종종 부르는 것 같은데, souvenir님의 "고전논리학"은 traditional logic을 가리키는 것이겠지요.(이 댓글을 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밝혀 둡니다)
그런데, A와 E가 반대 관계이고 A와 O가 모순 관계이고 E와 I가 모순 관계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명제론』에서 제시한 것입니다. 따라서 A와 O가 서로 모순이기 위해 현대논리학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의 문제가 현재 완전히 해결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논의를 더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전통논리학 대 현대논리학의 구도보다는 보기에서 전제된 논리학 대 고등학교 1학년 수학 교과서에서 제시된 논리학의 구도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이해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는, 각각의 낱말에 대해 그 낱말에 해당하는 대상이 존재하는 맥락/상황에서만 그 낱말이 등장한다는 이해 방식입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말했듯이 루카시에비치의 그리고 『기호논리학』 11장의 벤슨 메이츠의 이해 방식입니다. 다른 이해 방식으로는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의 The Traditional Square of Opposition에 있는, A와 I는 존재함축을 갖고 E와 O는 존재함축을 갖지 않는다는 이해 방식입니다.)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하신 것이 맞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의 문제가 현재 완전히 해결된 것 같지 않다는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실제로, 지난 며칠간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이 그 부분이기도 했고요.
포괄성 뿐만 아니라 일관성에도 따라야 해서 3번이 오답이라는 설명은 매력적이고 타당한 설명인 것 같습니다. 평가원이 그렇게 대답할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평가원의 실제 의도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만일 그런 것이었으면 정말로 홀수형에서는 3번을 정답보다 먼저 배치하고 짝수형에선 나중에 배치하는 짓을 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고 출제한 문제 같습니다.
하지만 출제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지 자체의 정/오답 여부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수험생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라는데 저는 절대적으로 동의하지만, 교과서의 배경지식을 수험생이 적용했을 시에 보기와 지문의 서술을 적용하는데 있어 복잡한 문제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내 배경지식으로는 문제가 생기네? 를 눈치챘을 가능성도, 이론적으로지만 개미 콧물만큼이라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하여 42번 문제는 잘못 낸 문제, 못된 문제라고는 생각합니다만, 복수정답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가 부족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관련해서는 생각을 조금 더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선지는 길이순으로 배열되며, 홀짝에 따라 긴 것부터 배열되기도 하고, 짧은 것부터 배열되기도 합니다. 이는 홀수형을 출제 후 기계적으로 바꾸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 그런가요? 어쨌든 그걸 알고 그렇게 낸거라면 정말 진짜 나쁜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드네요. 원칙이 어떤 것이든지간에 ㅠㅠ
말씀하시기 전까지 홀짝형에 따른 유불리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2번만 보고 찍고 넘어간 학생과 3번에서 갸우뚱하다가 4번을 본 학생과의 유불리는 분명 있었을 것 같네요.
말씀하신 대로 학생이 없는 가능세계를 떠올리는 순간 보기가 사실상 수수께끼가 되어 버리기는 합니다. 과연 제시문과 보기가 양립가능한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죠. 보기를 읽을 때는 학생이 존재하는 가능세계만 고려하기로 한다, 라고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제시문과 보기로부터 수험생 입장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지도 불확실해 보이고요. 그렇기에 42번 문제가 못된 문제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3번 선지의 두 명제를 모순 관계로 착각해서 3번을 고른 경우와 제가 본문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사고의 경로를 밟았지만 일관성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해서 3번을 고른 경우는 분명 다르고, 이 둘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현재 상황에서 다른 길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이번 기회에 논리학 관련해서 여러 가지를 짚어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2와 관련하여]
지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전통 논리학에서는 “만약 A이면 B이다.”라는 형식의 명제는 A가 거짓인 경우에는 B의 참 거짓에 상관없이 참이라고 규정한다."
의 예문을 이런 식으로 바꾼다면 "만약 학생이면 연필을 쓴다"와 "만약 학생이면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되고, 기초지식이 있는 학생이라면 공집합일 때, 두 조건문이 참으로 규정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수학2 집합과 명제 단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의 반대개념과 상충됩니다.
이후 제시되는 반사실적 조건문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반으로, A가 참인 가능세계들 에 비교 할 때, B도 참인 가능세계가 B가 거짓인 가능세계보다 실세 계와 더 유사하다면, 실세계의 나는 A가 실되지 않은 경우 에, 만약 A라면 ~B가 아닌 B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험생 입장에서 이를 읽는다면, A가 거짓이거나 실현되지 않았을 때, '만약 A라면 B이다'와 '만약 A라면 ~B이다'는 전통논리학에 따르면 둘 다 참이고, 반사실적 조건문에 따르면 어느 하나만 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서술을 고려하면, 학생이 없을 때 전칭명제가 거짓이 된다는 해석은 출제자 입장에서도 쉽게 주장하기는 어려워보입니다.
만약 A이면 B이다 꼴의 명제는 조건언입니다. 42번 문제에서 논의의 주제가 되고 있는 AEIO는 정언문장입니다. 조건언과 정언명제를 동일선상에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조건언의 경우 전건이 거짓이면 후건의 참거짓에 상관없이 명제 자체가 참이 됩니다만, 정언명제의 경우에는 얘기가 다릅니다.
수험생 입장에서 이를 읽는다면 그렇게 볼 수 있다는 취지였습니다. "학생들이 당연시하는 상식을 적용했을 때 사실 그 상식에는 행간의 숨은 사실"까지 알지는 못할 거라 생각해서요.
하여간에 좋은 문제가 아니라는데에는 동의합니다. 머리가 좋은 수험생들이 틀리기 더 쉬운 문제를 내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해서요. 이 문제는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정답률이 훨씬 더 높았을 것 같네요. 아무튼 다음주에 결과가 나오니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평가원에서 42번 공식해설을 볼 수 있다는 데 이의제기의 의의를 둬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하하.
고등학교 1학년 수학 교과서에서 소개되는 논리학은 어떤 점에서는 좀 특이합니다. 가령 교과서에서 등장하는 "P이면 Q이다"에서 P와 Q는 (대부분) 명제가 아닙니다.(P와 Q는 그 자체로는 참도 거짓도 아닙니다) 따라서 수학 교과서를 세밀하게 읽은 학생이라면
"전통 논리학에서는 “만약 A이면 B이다.”라는 형식의 명제는 A가 거짓인 경우에는 B의 참 거짓에 상관없이 참이라고 규정한다."
가 자신이 알고 있지 않은 새로운 내용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고등학교 1학년 명제 단원을 떠올리면서
학생이 없는 가능세계에서는 "모든 학생은 연필을 쓴다"와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모두 참 아니야?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는 건 맞을 것 같네요.
이 논의를 지켜보시는 분들 중, 수학교과서에 어떻게 서술되어 있는지 보고 싶은 분이 혹 있을까봐, 비상교육 수학2 교사용 지도서 일부를 타이핑합니다.
지도 Tip
- '모든'을 포함하는 명제는 모든 x에 대하여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즉, 어떤 하나의 x에 대해서도 조건을 만족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 명제는 거짓임을 알게 한다.
- '어떤'을 포하하는 명제는 조건을 만족하는 값이 단 하나라도 존재하면 참이고, 존재하지 않으면 거짓임을 알게 한다.
-명제의 부정을 만들 때 다음 사항에 유의하도록 한다.
① ~(모든 A는 B이다) ⇔ 어떤 A는 B가 아니다.
② ~(어떤 A는 B이다) ⇔ 모든 A는 B가 아니다.
③ ~(적어도 하나는 B이다) ⇔ 모두 B가 아니다.
나카렌 님 본문 중 "일반적으로 양화를 다루듯이 가능세계에 대한 양화를 다루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판단하였고(따로 단서가 없으니까)"에 대한 제 부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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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의제기 방식에 대해, PokerFace님께서 가능세계의 존재양화 오류를 범했다는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이는 크립키가 ‘가능세계’의 오용에 대해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가능세계’ 개념의 오용, 즉 가능세계를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과 같은 것, 우리 주변 환경과 비슷하지만, 다른 차원 속에 어떻게든지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 또는 우리를 ‘통세계적 동일성’의 사이비 문제로 인도하는 그러한 오용에 대해 비판했다. (중략) 나는 ‘세계의 가능한 상태(또는 역사)’ 또는 ‘반사실적 상황’이라는 용어를 대신 사용할 것을 추천한다. 또한 ‘[가능]세계’란 용어가 종종 ‘……은 가능하다’란 양상표현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크립키의 『이름과 필연』을 이병덕의 『표상의 언어에서 추론의 언어로』에서 재인용)
그런데 제 생각에는 이러한 지적은 제시문의 정보를 넘어서는 배경지식에 의한 문제제기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지문에 ‘가능세계’의 정의가 명확히 제시되지 않고 논의가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문단에서 “㉡다보탑은 개성에 있을 수도 있었다.”를 “다보탑이 개성에 있는 가능세계는 있다고 표한다.“라고 나타낸 것을 통해, 아래와 같은 주의사항을 추론해낼 수는 없어보입니다.
“가능세계들이 먼저 주어지고, 그 다음 통세계적 동일성의 기준들에 관한 물음들이 제기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직면하고, 확인할 수 있는 대상들이 먼저 주어진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그 대상들에 관해 무엇이 참일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물을 수 있다.”(같은 책)
이런 관점에서 제시문을 읽는다면, “필연이지는 않은 명제는 우리의 실세계를 비롯한 어떤 가능 세계에서는 성립하고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제시문 2문단), "A가 참인 가능세계들에 비교할 때, B도 참인 가능세계가 B가 거짓인 가능세계보다 실세 계와 더 유사하다면"(제시문 3문단) 등을 읽을 때 가능세계를 경우의 수를 따지듯 살펴보는 것이 비록 학술적으로는 틀릴지언정, 제시문을 오독했다고까지 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따라서 제가 가능세계를 존재양화하여 경우의 수를 따지듯 살펴본 것이 학술적으로는 오류겠지만, 과연 주어진 제시문만으로 이러한 결론에 이를 수는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적어도 인용하신 크립키의 논의는 가능세계에 대한 존재양화 자체에 반대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멀리 떨어진 다른 행성처럼 가능세계들이 먼저 있다는 식으로 가능세계에 대한 존재양화를 하는 것에는 크립키가 반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문장들의 분석을 위한 이론적 도구로서 존재양화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크립키가 반대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수능 제시문의 가능세계 또한 분석을 위한 이론적 도구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 같고요.(더 정확히는 가능세계 자체의 성격에 대해서는 상당히 중립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설명 탑재 없이 이상 없다는 발표가 나왔습니다. 허탈하네요.
결과와 무관하게, 그간 이곳에서 멋진 의견 펼쳐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